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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중국사

수나라 문제 양견 - 270년만에 중국을 통일하고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다

by 바투리아 2015.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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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수나라 문제 양견 - 270년만에 중국을 통일하고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다

 

 

  

수나라 초대황제인 문제 양견(541~604)은 서진이 멸망한 이후 270여 년만에 중국을 통일한다. 위진의 짧은 통일기를 제외하면, 황건의 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후한 멸망 이후 거의 400만에 중국을 통일한 것이다. 수나라를 창건한 수 문제 양견은 인수 4년(604년)에 사망한다. 수 문제가 사망한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지만, 그 중에서 둘째 아들인 황태자 양광(훗날 수 양제)이 제 아비를 암살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실제 중국 공식 사서의 기록에 그렇게 적혀 있다. 604년 4월에 수 문제는 병으로 드러눕게 되었는데, 같은 해 7월에 병상에서 사망했다. 

 

 

 

당시 수나라에는 분명한 후계자 문제가 있었다. 문제의 맏아들이었던 원래의 황태자 양용은 어머니인 독고황후의 미움을 받아 황태자 자리를 잃고 쫓겨나게 된다. 덕분에 둘째 아들이었던 양광이 어부지리로 황태자 자리를 계승하게 된 것이다. 

 

 

 

 

 

<중국 수나라 최대 판도 (사진출처 : 위키백과)>

 

 

 

수나라의 황족 양씨는 북방의 유목민족 출신이었다. 일단 모계 쪽인 독고씨는 선비족의 명문 집안인 독고신의 넷째 딸이었다. 모계는 확실한 북방 유목민 (선비족) 출인이었다. 아버지인 수문제 양견은 북주의 신하였던 시절에 "보륙여"라는 선비족의 성씨를 썼다. 그리고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직전에야 한족의 성씨인 "양"씨를 자신의 성으로 쓰기 시작했다. 물론 이 당시는 선비족이 지배 집단을 이루던 시절이었으므로 수문제 양견 역시 실제로는 한족이었지만 선비족 황제가 하사한 보륙여라는 성을 쓴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수문제 양견이 원래 선비족이고, 한족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한족의 성씨를 쓴 것일 수도 있다. 수문제 양견이 정말 선비족 출신인지 한족 출신인지는 아직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렇지만 어쨌든 부인인 독고황후가 확실한 선비족이었으므로 그 아들들이 최소한 50%는 선비족의 피를 물려받은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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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양광의 암살설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는 공식 역사인 <수서>에 기록되어 있는 일련의 사건들 때문이다. 아버지인 수 문제는 천하통일의 과정에서 남조 진나라를 멸망시켰는데, 이 남조 진나라 마지막 황제의 누이가 수 문제의 후궁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선화부인으로 불리는 여인이었다. 수 문제는 선화부인에게 꽤 사랑을 쏟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수 문제가 병상에 있을 때 훗날 수 양제가 되는 양광이 아버지의 여인인 선화부인에게 다가섰고, 선화부인은 양광을 거부하고 몸을 피해 수 문제에게 도망쳤다. 평소와 다른 선화부인의 행동을 보고 문제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선화부인은 "태자가 무례합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문제는 진노하여 "짐승 같은 놈에게 어찌 대사를 맡기겠는가! 독고가 나를 그르쳤구나!"라고 외치곤 폐해진 원래의 황태자 양용을 부르라고 명령했다. 즉, 독고황후의 말을 듣고 첫째 아들을 황태자에서 폐하고 엉뚱한 녀석을 황태자로 세웠다고 언급한 것이다. 황태자를 다시 바꿀 뜻을 내비친 것이다. 자신의 생명이 곧 꺼질 것을 알고 원래의 황태자를 세우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수나라 건국 황제 문제 양견 (사진 출처 : 위키백과)>

 

 

그런데 수 문제의 명령을 받고 첫째 아들 양용을 부르러 가던 병부상서 유술이 양광의 참모인 양소에게 붙잡혀 결국 양용을 불러오라는 황제의 명령을 집행하지 못했다. (이 양소라는 인물은 훗날 수나라에 대항한 반란의 물결을 일으킨 양현감의 아버지다) 문제의 병환을 틈타  황태자 양광이 이미 궁궐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양광은 자신의 심복 장형을 아버지의 침전에 들게 하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후궁들을 밖으로 내보냈는데, 그 사이에 수 문제가 사망했다. 

 

 

 

또다른 기록인 마총의 <통력>에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양소는 장형을 안으로 들게 하여 황제를 꺾었다. 피는 병풍에 튀었고, 원통한 소리가 밖까지 들렸다. 붕어하셨다." 그리고 <통력>에는 문제가 양광을 "짐승같은 놈"이 아니라 "죽은 개자식"이라고 칭했다고 적었다. 문제의 진노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렇게 아들의 손에 죽고 말았다. 

 

 

문제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선화부인을 비롯한 후궁들은 벌벌 떨고 있었는데, 그 시대만 해도 황제가 사망하면 후궁들은 죽음을 강요받거나 절에 들어가서 평생 유폐되는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고대의 악습인 순장은 이젠 사라진 상태였다. 선화부인이 있는 곳에 황태자 양광의 사자가 황금으로 된 작은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선화부인은 당연히 그것이 독약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그것은 황태자 양광의 "연애 편지"였다. 선화부인은 화를 내며 그것을 거부했지만, 주변 궁녀들의 설득에 결국 황태자 양광의 뜻에 따랐다. 아버지가 죽은 날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가 당나라에도 있었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동생의 미망인을 자신의 후궁으로 들였다. 또한 태종의 아들인 당나라를 고종은 아버지 태종의 애인이었던 무측천을 자신의 황후로 앉혔다. 그리고 당나라 현종은 자신의 며느리인 양귀비와 사랑에 빠졌다. 

 

 

 

이러한 수나라와 당나라의 역사적 사례를 두고, 어떤 역사가들은 선비족을 비롯한 유목민족의 습성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유목민족들은 아버지가 사망하면, 그 아들이 자신의 생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처첩을 모두 자신의 소유로 했다. 사실 이건 농경민족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풍습인데, 아마도 단일한 공동체로서 유목 부족들은 만약 아버지의 처첩을 소유하지 않으면 그 여성들이 결국 가족없이 초원에 버려지게 되는 사정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아무튼 황태자 양광은 아버지를 살해한 후 자신의 친형도 죽인 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바로 수나라 양제다. 

 

 

 

수나라를 창건한 양씨는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겪게 된다. 문제 자신은 아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그 다섯 아들 중 병으로 죽은 셋째 아들 외에는 모두 비명횡사했다. 그리고 그 손자들 역시 단 한명만 제외하고 모두 전쟁터에서 죽거나 처형당했다. 결국 살아남은 손자 단 한 명만이 돌궐 땅으로 달아났고, 그 외에는 절멸된 것이다. 문제가 황제가 된 후 북주의 황족인 우문씨를 남김 없이 몰살시킨 업보라는 이야기도 있다.

 

 

 

- 2014년 12월 11일 작성

- 2015년 5월 24일 일부 수정 후 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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