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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중국사

수나라 멸망과 당 고조 이연의 당나라 건국

by 바투리아 2015.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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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멸망과 당 고조 이연의 당나라 건국

 

 

 

 

수나라는 2대 황제인 수 양제 시절에 멸망하고 만다. 중국대륙을 270년만에 통일한 대제국치고는 너무 짧은 역사다. 양제 재위 시기에 대운하 공사 등 대규모 토목공사 때문에 대규모 농민반란이 자주 일어나고,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국력이 점차 쇠퇴하게 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대혼란, 대반란의 시기에 주요 군벌이었던 이연(훗날 당 고조)은 경쟁자들을 제압하고 마침내 중국대륙을 통일한다. 

 

 

 

이연 이전에 더 뛰어난 군벌들이 존재했다. 우선 이밀(582~618)을 들 수 있다. 수나라 말기 최대 군벌 중 하나였던 이밀은 중국의 역대 왕조가 수도로 정해왔던 낙양(뤄양)을 포위공격했으나 전쟁의 양상은 지구전으로 진행되었다. 중국대륙 최대 도시답게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쌓인 낙양성이 쉽게 함락되진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낙양성을 지키고 있던 군대는 수나라 양제가 파견한 왕세충의 군대로서, 왕세충은 과거 여러 농민 반란을 진압하며 두각을 나타냈던 재능있는 장군 중 하나였다.

 

 

 

그러던 중 강남의 양주에서 수나라 2대 황제 양제가 부하들의 반란으로 살해되었다. 이 반란을 주도한 자들은 우문씨 일족이었는데 이들은 북주의 우문씨와는 계통이 다른 일족으로 알려져있다. 반란의 주모자인 우문화급과 우문지급은 수 양제를 살해한 후 관중(지금의 서안 인근) 병사들을 이끌고 고향인 관중 땅으로 돌아가려고 긴 행군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들은 양주를 떠나기 전 수 양제의 조카인 양호를 새로운 황제를 내세웠다. 낙양을 지키고 있던 왕세충의 군대는 수 양제의 시해 소식을 듣고 이미 새로운 황제로 양제의 아들 중 하나인 양통을 세웠다. 참고로 우문화급과 우문지급 형제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총사령관이었던 우문술의 아들들이다. 또 다른 아들 우문사급은 양제의 사위로서 양제를 시해할 때 참가하지 않았고, 이때 살아 남아 훗날 당나라의 높은 관직(중서령, 양주도독, 포주자사 등)에 올랐다. 수나라 양제는 시해되기 전 거울을 바라보며 "이 목을 누가 가져갈 것인가?"라고 혼잣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미 수나라는 끝장났으며 자신의 목숨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것이다. 어쨌든 자신의 예상대로 최측근 장군들이 반란을 일으켜 죽임을 당했다.

 

  

 

이렇게 황제를 옹립한 두 세력이 양립하는 가운데 낙양 인근에서 세 군대가 마주치게 되었다. 바로 낙양의 왕세충 군대, 그리고 이밀의 낙양 공략군, 그리고 양주에서 장안으로 이동 중인 우문화급의 군대였다. 낙양에서 왕세충의 전횡에 저항하던 세력은 자신들을 포위공격을 하고 있던 이밀에게 은밀한 제안을 한다. 즉 이밀에게 관직을 줄테니 새로운 황제에게 귀순하고, 장안으로 행군 중인 우문화급을 공격해 죽이라는 것이다. 이 대가로 이밀에게 태위(국방부장관), 상서령, 동남도대행대행군원수, 위국공 등 어마어마한 관직이 수여되었다. 이들은 이밀을 불러들여 왕세충을 견제할 계획까지 세워두고 있었다. 이밀은 이러한 제안을 받아들여 우문화급의 배후를 기습해 쉽게 승리를 거두었고, 많은 병사들이 이밀에게 투항했다. 우문화급의 군대는 양주에서 장안으로 긴 귀향길에 들떠 있는 군대로 사기가 무척 낮았다. 게다가 수나라 양제를 따라 억지로 장안에서 양주까지 가야 했던 관료집단과 궁녀들까지도 이들 무리에 함께 있었다고 하니, 이런 집단을 상대로 승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우문화급은 위현으로 패주했고, 이곳에서 자신이 옹립한 새로운 황제 양호를 살해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그러나 그의 세력 범위는 자신의 부대 영내를 넘지 못한 가련한 신세였다. 이를 지켜보던 두건덕이 우문화급을 공격해 생포되었고, 두건덕은 우문화급에게 "주군 살해죄"를 씌워 참수했다. 마찬가지로 동생인 우문지급과 아들 우문승기, 우문승지 모두 참수형을 당했다. 그리고 두건덕은 돌궐의 계민가한에게 시집가 있던 수나라 의성공주에게 우문화급의 목을 보냈다. 

 

 

 

아무튼 우문화급을 패주시킨 이밀은 약속대로 관직을 받고 낙양의 새로운 황제를 알현하고자 했으나 자신의 반대파의 속뜻을 알아차린 왕세충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왕세충은 이밀을 불러들이고자 한 원문도와 노초 등을 숙청하고, 낙양을 향해 다가오는 이밀의 군대를 격파했다. 우문화급을 패주시키고 낙양의 포위를 풀고 황제를 알현하고자 했던 이밀의 군대는 너무 안일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이밀은 세력을 잃고, 장안을 함락시킨 이연에게 몸을 의지하러 갔다. 낙양의 왕세충은 반대파를 제거한 후 자신이 옹립한 황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수나라 말기 수 양제가 죽은 후 수없이 많은 자들이 각지에서 할거해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도처에서 반란군과 도적떼가 들끓었고, 조금이나마 신망이 있고 지도력이 있는 자는 수만의 무리를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깃발만 세우면 수만명이 모여들었다. 그만큼 경제가 황폐화되고 농민들의 삶이 파탄난 것이다. 특히 하남, 하북, 산동 지역에 반란군의 숫자가 많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고구려 원정군에서 탈영한 병사, 인부들이 산마다 숨어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고조 이연도 자신의 근거지인 태원에서 장안을 공략하러 행군할 때 출발할 때는 단지 3만명의 병사밖에 없었으나 산천을 떠도는 농민들을 받아들여 장안을 공격할 때는 20만의 대군으로 성장해 있었다. 

 

 

 

<당나라 초대 황제 당고조 이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수나라의 수도인 장안성을 장악한 이연 역시 황제를 칭했다. 국호는 "당"이라고 했고 "무덕"이라는 연호까지 사용했다. 당시 시대상으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자라면 너도 나도 황제를 칭했기 때문이다. 재밌는 일화로, 고담성이라는 승려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비구니를 황후 자리에 앉힌 일도 있었다. 물론 이 승려는 금새 다른 황제에게 살해당했다. 아무튼 평범한 수많은 황제들 중에서 당나라 황제 이연은 다른 황제들을 죽이고, 최후의 승자가 된다.

 

 

 

이연에게 도망친 이밀에게는 훗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위징과 서세적이라는 부하장수가 있었다. 위징은 훗날 당나라 초기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쳤다. 당태종이 고구려 원정에서 패배한 후 위징의 충언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서세적은 훗날 이세적으로 성을 바꾸었고, 그 후에는 이적으로 이름도 바꾸었다. 당나라 창립 후 병주도독을 맡아 북방의 돌궐을 정복하고,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군의 총사령관(요동도 행군대총관)이었으며, 훗날 당고종이 즉위한 후 또다시 고구려를 침공해 신라군과 연합해 평양성을 함락시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이밀은 이토록 훌륭한 부하들을 이연에게 모조리 빼앗기고 만다. 당나라 황제 이연이 이밀에게 내린 관직은 "광록경"이었다. 이 관직은 천자가 먹는 "술과 음식"을 권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공손히 식사를 권하는 관직"을 받은 이밀은 굴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점차 자신에 대한 대우에 불만을 느껴 동쪽으로 가 산동지방을 평정하는 공을 세우겠다고 청한 후 군대를 이끌고 출병한다. 그러나 당나라 조정은 병사들을 끌고 출발한 이밀에게 "홀로 돌아와 다시 명을 받을 것"을 명하고, 이밀은 자신이 장안으로 가면 반드시 처형될 것이라 생각해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결국 당나라 군대에게 패하여 사로잡히고 참수되는 운명에 처한다. 

 

 

<처음에는 이밀을 따랐던 위징. 훗날 당나라 초기 명재상이 된다>

 

  

당 고조 이연은 이밀을 처형한 후 낙양의 왕세충을 공격한다. 왕세충은 자신과 그리 사이가 좋지 못했던 두건덕에게 구원군을 요청하고, 두건덕은 왕세충이 멸망하면 다음 목표는 자신이 될 것임을 잘 알았기에 구원군을 파병한다. 이 낙양 공략의 총사령관은 다름 아닌 훗날의 당태종 이세민이었다. 이세민은 앞뒤로 적을 맞게 되자 과감한 전술을 구사한다. 낙양에는 소수의 병력만 남기고 배후를 공격하는 두건덕 군을 공격한 것이다. 두건덕 군을 패퇴시키지 못하면 어차피 승리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전술이었다. 특히 이세민은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두건덕 군대의 배후 깊숙히 돌아 들어가 두건덕의 후방을 매섭게 공격했다. 이에 두건덕 군대는 지리멸렬 하게 되고, 두건덕이 패주하자 왕세충은 낙양성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 왕세충은 처형은 면하였지만, 예전에 자신이 처형했던 독고기의 아들인 독고수덕에게 622년에 암살당했다. 

  

 

 

<당나라 2대 황제 당태종 이세민>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은 알고 보면 수나라 양제와 이종사촌 사이였다. 수 문제는 독고신의 넷째 딸과 결혼했으며, 당 고조 이연의 아버지인 이병은 독고신의 아홉번째 딸과 결혼한다. 수나라 독고황후가 바로 이연의 이모였던 것이다. 선비족 명문가였던 독고신의 딸들과 결혼했으므로, 당 고조 이연도 50% 이상 선비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당나라를 한족의 나라로 내세웠다. 그는 당나라를 세운 후 차례 차례 주요 군벌들을 쓰러 뜨려나갔으며, 결국 중국 대륙을 다시 한번 통일한다.

 

 

 

 

- 2014년 12월 11일 작성

- 2015년 5월 24일 일부 수정 후 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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