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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길을 묻다

내가 감정평가사 공부를 시작한 이유

by 바투리아 2021.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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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3일, [10월의 영광] 까페에 썼던 글. 당시 조금 고독한 마음에 그냥 재미로 써 본 글인데 의외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리고 [10월의 영광]이 망한 이후로 [12월의 영광]에 재차 같은 글을 게시했는데, 많은 분들이 즐거워했다.

글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거나 잊혀질까 두려워 블로그에 보관해본다. 90%는 팩트에 기반했고, 10%는 재미있게 꾸며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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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학교 앞에
병아리를 파는 아저씨가 종종 오곤 했다.
어린 내가 물었다
“아저씨 이거 알도 낳아요?”
아저씨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닭까지 키우면 알도 낳지”
나는 주머니 뒤져서 동전 몇개를 겨우 찾아서
냉큼 아저씨에게 주고
병아리 두마리를 소중하게 안고 집에 갔다.


어머니는 의외로 병아리를 싫어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도 형도 좋아했다.
온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데
멸치였나? 암튼 뭔가 반찬을 줬는데
서로 먹겠다고 쫓고 쫓기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아직도 그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며칠 후 병아리들이 아팠다.
둘다 시름시름 앓았다.
어머니는 어차피 죽을 거 같은데
사람이 먹는 감기약을 먹여보면 어떨까 말씀하셨다.
두 녀석에게 내 감기약을 물에 타서 억지로 먹였다.


그날 밤 한마리는 별이 되었고
나머지 한마리는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무척 건강하게 잘 뛰어다녔다.
약에 있는 항생제가 효과가 있었나보다.
그렇게 몇달이 지나고
병아리는 닭이 되었다.


그런데 이 닭이...
아침마다, 아니 새벽마다 꼬끼오 하고 울부짖었다.
그래, 이 녀석은 수컷이었던 것이다.
내가 속았다.
아저씨가 몇백원 벌려고
순진한 아이를 속였던 것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난 닭을 사랑했다. 병아리일 때부터 죽 사랑해왔다.
매일 모이를 주고 온갖 벌레를 잡아서 주었다.
사랑으로 보살폈다고나 할까.


어느 일요일 오후
평소처럼 교회에 갔다가
오락실에서 한참 놀다 온 내 앞에
삼계탕이 점심식사로 차려졌다.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잠시 후 닭에게 모이를 주려고 했는데
닭이 없어졌다.
사랑하는 닭아 어디갔니.
어머니에게 물어보니 창문으로 뛰어내려 가버렸다고 한다.
우리집은 아파트 4층인데..
뛰어내렸다고? 날아간건가? 비둘기처럼?
비둘기도 닭처럼 뚱뚱한데 잘 나니까
닭도 잘 날아간 걸까?


닭은 어디로 갔을까?


내가 병아리 감별법을 알았더라면
그리하여 아저씨 말에 속지 않고
병아리를 구입하지 않았더라면
이 비극은 애시당초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미안해 닭아.


성인이 된 후 계속 닭에 대해 죄의식을 갖고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감정평가사라는 직업이 있다고 들었다.
병아리감별법을 애타게 배우고 싶던 나는
망설임없이 감정평가사 시험에 인생을 걸었다.
이것만이 내 닭의 비극에 속죄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분해법이니, 내부수익률이니, ATCF니, 하자승계니, 기사동이니, 최유효이용이니, 어이쿠 지랄을 한다.
이게 뭐지?
포기하고 싶었다.
이 길이 과연 맞는 길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하지만 마침내 해답을 찾았다.
토지보상법 시행규칙 제49조 축산업보상평가를 배우게 된 것이다.
소중한 조항... 달달 외웠다.
그리고 칙 별표3도 달달 외웠다.
닭 200마리 토끼 150마리 ...... 꿀벌20군..
난 축산업보상 전문가가 될테다.


이 길로 올 수 있게 해준
별이 되어버린 병아리들이 사무치게 그리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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